이란-카자흐스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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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2.2. 근세
2.3. 19세기
2.4. 20세기
2.5. 21세기
3. 문화 교류
4. 대사관
5. 교통 교류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란카자흐스탄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카자흐스탄은 역사적으로 이란의 영향을 받았고 소련 해체 이후에 양국은 수교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중세[편집]


오늘날 이란과 카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중세 이슬람 철학의 대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알 파라비가 서로 자국의 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대학교 중 하나의 이름부터가 알 파라비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이며 텡게에 알 파라비의 삽화가 들어갔을 정도였다.# 한 편 이란 역시 알 파라비가 이란인이라고 주장하며 알 파라비를 기념하는 우표를 내기도 했다. 카자흐스탄 화폐에 삽입된 알 파라비의 삽화는 해당 인물을 현대 카자흐인과 비슷한 외양으로 묘사된 반면, 이란 등에서 알 파라비를 자국 위인으로 묘사할 때는 이란계 백인종으로 묘사되어 있다.

양 지역에 기반한 국가들 사이의 본격적인 외교적 관계는 일 칸국킵차크 칸국의 외교 관계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13세기 몽골 제국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정복하고, 몽케 사후 분열되면서,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일대를 중심으로는 킵차크 칸국, 페르시아에는 일 칸국이 들어섰다. 몽골 제국의 방계 국가들은 서로 영토를 두고 다투는 일이 많았고, 국경을 접했던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에서도 영토를 두고 여러 차례 분쟁이 발생하였다. 남아제르바이잔에서 캅카스에 이르는 지역은 물론 킵차크 칸국의 국경과 인접해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몽골 제국의 방계 국가들 중 원나라는 목초지 부족으로 기병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일 칸국은 목초지가 풍부하고 여름에도 무덥지 않은 남아제르바이잔 일대를 근거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양국 사이에서는 특히 캅카스 지역 등을 중심으로 국경 분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몽골 제국의 방계 국가라는 공통된 기원에도 불구하고 일 칸국과 킵차크 칸국의 국가 운영과 문화는 서로 상이했다. 킵차크 칸국의 주민 상당수, 킵차크인과 쿠만인, 볼가 불가르인 등등은 튀르크계로 사회 문화적으로 몽골족들과 공통점이 많았고, 몽골 왕족들은 현지 킵차크인들, 불가르인 등등과 두 세대도 되기 전에 급속도로 동화되었다. 반면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페르시아인 신민들과 문화에서 상이하였다. 일 칸국의 몽골 왕족들은 몇 세대까지 불교를 유지하였던 것은 물론, 인구의 대다수인 무슬림 신민들을 제어하기 위하여 일부러 유대인들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을 우대하였다. 킵차크 칸국은 일 칸국과의 국경 분쟁에서 일 칸국의 이슬람 탄압을 구실 삼아 전쟁을 정당화할 때가 많았다.

몽골 제국의 역사는 일 칸국의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1] 아타 말릭 주와이니 혹은 라시드 앗 딘 하마다니 등등 페르시아인 사가들의 기록물은 따라서 중세 킵차크 칸국의 역사 그리고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의 외교사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1차 사료이다.

2.2. 근세[편집]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이 분열되고 약화되는 과정에서 티무르티무르 제국을 건설하고 이란 각지를 약탈함은 물론 킵차크 칸국을 공격하여 크게 약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몽골 제국의 침략에서도 살아남았던 카자흐스탄 남부 일대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공동체가 와해되었다. 흑사병 그리고 티무르 제국의 공격을 받은 카자흐스탄 일대의 네스토리우스파 공동체는 오늘날 이란 서부에서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현지에 잔류한 기독교인 집단은 사멸하기에 이른다.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 제국의 공격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한 것을 계기로 서서히 여러 갈래의 국가로 나뉘어지는데 그 중 한 갈래가 바로 카자흐 칸국이었다.

한편 이란 지역에는 시아파 수피 근본주의 교단인 사파비야 수피 교단에 의해 사파비 제국이 세워졌다. 사파비 제국은 시아파 극단주의 정책을 펼쳐 이란 내 주민들이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시키거나 추방 혹은 학살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그 결과 사파비 제국은 순니파 국가들과 외교 관계가 악화되고 단절되기 이른다. 카자흐 칸국 역시 명목상 순니파 국가였고, 더욱이 사파비 제국과 카자흐 칸국 사이에는 히바 칸국이 가로막고 있었다. 상술한 이유로 근세부터 근대까지 양측의 교류는 상당히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2.3. 19세기[편집]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제국이 카자흐 칸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근대까지 카자흐인들은 명목상 무슬림이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튀르크 토속 신앙의 영향이 더 컸고 관혼상제 역시 이슬람식보다는 전통적인 텡그리 신앙 방식으로 치루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즉 카자흐인들의 전통 문화에서 이란 문화가 끼친 영향은 그렇게 큰 수준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 문화가 고대와 중세 카자흐스탄 일대 여러 도시들에 상당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맞지만, 유목민족인 카자흐인들의 발흥 이전 해당 지역들은 몽골 제국의 침략과 티무르 제국 시대 전쟁 등을 거치며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근세 이래 페르시아 문화가 카자흐스탄 일대 주민들에게 실전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제국은 카자흐인들을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자국 내 주요 무슬림 집단이던 볼가 타타르인들을 파견하곤 했는데, 이들 볼가 타타르인들이 카자흐인들에게 이슬람 샤리아와 관혼상제 등을 도입시켰다. 근현대 타타르인들과 카자흐인들 사이의 교류는 현대 카자흐 문화 및 무슬림 민족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2.4.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후에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세워졌다. 당시 카자흐스탄 지역은 소련의 자치 공화국(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이란과는 외교관계가 없었다. 카자흐스탄 대기근 당시 일부 카자흐인들이 기근을 피해 이란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은 문화와 언어가 그나마 비슷한 이란 북동부의 투르크멘인들과 동화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 카자흐스탄은 독립국이 되면서 양국은 공식수교했다.


2.5. 21세기[편집]


양국은 이슬람 협력기구의 회원국들이다. 그리고 양국간의 교류가 존재한다. 양국은 석유 수출 관련해서 서로 경쟁하는 입장이다. 이란인 유학생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오는 경우가 존재하며 양국간에는 경제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양국은 러시아와 협력, 교류가 활발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소련의 일부였던 카자흐스탄의 경우 러시아와 출입국 정책 상당부분을 공유하고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에 판매되는 상품, 인프라가 유사한 것에 비해서 이란은 문화적으로는 러시아와 차이가 큰 편이다.

3. 문화 교류[편집]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전통 명절이던 노루즈는 여타 중앙아시아 및 캅카스 지역과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에서도 정통 명절로 기념되고 있다. #

역사적인 이유로 이란과 카자흐스탄은 언어, 문화, 종교에서 공통점이 존재하며 카자흐스탄은 이란의 영향을 받았다. 카자흐어에는 다른 중앙아시아쪽의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중세 페르시아어 어휘를 상당부분 흡수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이슬람교를 대부분 믿지만, 카자흐스탄은 순니파, 이란은 쉬아파를 믿고 있어서 종파에서 차이점이 있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 제국,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속국가가 된 반면, 이란은 70년대 후반에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가 되면서 차이점이 존재한다.

4. 대사관[편집]


아스타나에 주 카자흐스탄 이란 대사관, 테헤란에 주 이란 카자흐스탄 대사관이 존재한다.


5. 교통 교류[편집]


두 나라들을 잇는 항공 노선이 존재한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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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나라의 역사를 다룬 원사는 명나라가 대도(북경)을 점령한 이후 명나라 측에서 만든 역사서이지, 몽골 제국에서 직접 편찬한 역사서가 아니다.